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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DRAMA REVIEW

<안나> 리뷰 : 행복은 거짓말로 쌓을 수 없다

by 93년의 해일 2025. 1. 18.

 

<안나> 포스터 ⓒ쿠팡플레이
<안나> 스틸컷 ⓒ쿠팡플레이

 

*<안나>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사소한 거짓말 하나로 시작된 거짓된 삶. 안나 드라마를 한줄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는 내가 피카레스크 장르를 처음 인지했을 때 접한 드라마였다. '악역'을 주인공으로 삼는 장르가 피카레스크인데, 이 드라마를 보고 다른 피카레스크 장르의 작품들을 접한 뒤 다시 이 드라마를 보니 감상이 조금 바뀌었다. 드라마 속 안나는 정말로 악역이라 할만한 사람이었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지적 허영심과 예술에 관심 많았던 유미가 주인공이다. 유미가 여타 평범한 스토리의 주인공들처럼 부단한 노력으로 상류층까지 도달했다면 내용이 달랐겠지. 안나는 그보다 꿈은 없고 현실적이다. 요즘 노력만으로 계층 사다리를 이동하긴 어려우니 말이다. 유미는 거짓말이라는 편법을 써서 상류층의 세상으로 편입된다.

 

작품 내내 유미는 거짓말을 한다.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한 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유미를 유혹하고 움직이게 하는 건 결국 거짓말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순간 순간마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유미가 정말 나쁜 사람인지도 곱씹게 된다. 능력도 있고 꿈도 있던, 그런 유미에게 처음부터 주어진 게 많았더라면 어땠을까. 혹은 인생의 순간 순간마다 정직한 선택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제자를 예일에 합격시키는 에피소드를 보면서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유미는 분명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유미의 첫 거짓말은 부모님을 실망시키기 싫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 또한 안타까웠다. 우리는 누구나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하곤 한다. 그 거짓말을 성실함으로 진실로 바꾸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대학에 합격했다는 거짓말은 유미 인생의 분기점에서 가장 큰 거짓말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이렇듯 '그때라도 진실을 말했다면 어땠을까' 바로 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한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심리 묘사의 치밀함과 잔잔한듯 잘 짜여진 내용 전개이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는 듯 인상깊은 연출이 참 많았던 드라마였다. 안나의 거짓말이 남편에게 까발려지고 궁지에 내몰릴 때, 유미가 진짜 안나인 현주의 환상을 보는 것 등등. 안나 이름의 의미가 나올 때 유미의 감정 연기도 기억에 남는다. 진짜 공주였던 아나스타샤를 연기한 안나 앤더슨의 이야기의 비유는 '안나'라는 이름조차 가짜라는 걸 말해준다. 유미는 안나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안나'라는 이름으로는 진짜가 될 수 없다는 것. 유미는 결국 허물을 쟁취하려 했을 뿐인 걸 잘 나타낸다.

 

유미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장면도 좋았다. 계단은 유미의 인생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거짓말이 탄로날까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구 계단을 사용하는 모습은 상류층으로 가기 위해 아등바등 한 단계씩 오르는 유미의 삶과 꼭 닮았다. 남들에겐 보여지지 않는 수많은 계단을 오르면서 때로는 다리가 아파서 두드리기도 하고 때론 잠깐 쉬기도 하지만 어쨌든 유미는 끝까지 그 계단을 올라간다.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오른 계단의 끝에는 처음부터 최상위 층에 있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힘들이지 않고 그 계급에 도달해 있는 진짜 안나. 두 사람이 마주하는 그 장면은 이 드라마의 모든 순간을 통째로 관통하는 것이라 느꼈다. 유미가 최상위 층의 계급에 도달했을 때, 그녀의 모든 것을 앗아갈 진실이 기다리는 모습 말이다. 풍족과 가난, 계층간의 갈등은 이 드라마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마지막화에서 폭발하는 차를 등지고 끝없는 도로를 울면서 걸어가는 유미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었다. 차에 불을 지르고 그것이 폭발하고, 유미를 정신병동에 집어넣으려던 남편이 사망하는 그 장면은, 단순히 위기를 모면한 엔딩이 아니었다. 유미가 그때 등 뒤에 두고 온 것은 그때까지 유미가 했던 거짓말들의 집약체이고 유미가 얻었던 모든 것이었다. 어렸을 적 유미가 배웠던 건 '포커페이스'였고 그것을 무기로 가난에서 벗어나 상류층으로 아등바등 올라온 거였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는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고 엉망진창으로 우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작품의 첫 화를 생각하면 정말 인상 깊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화 후의 후유증이 길게 남은 드라마이기도 했다. 이후에 유미는 거짓을 완전히 벗어버렸을까? 짐작만 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후일담을 보면 유미는 걸어서 미국을 횡단해 캐나다 산속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참 믿기 어려운 말이고, 사람들은 거짓말이라 여긴다. 하지만 유미가 두고 떠난 차를 떠올려 보면, 그녀가 그곳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려보면 가장 거짓말 같은 그 말이 유미의 진실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거짓말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곳에서 썰매를 끌고 불꽃을 보는 유미는 행복해보였다. 

 

이렇듯 안나는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이 있는 작품이었다. 거기에 더해 심리 묘사를 드러내는 음악까지 좋았던 드라마이다. 나는 처음부터 감독판으로 이 드라마를 보았는데, 왜 감독과 플랫폼이 마찰이 있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안나는 너무도 완성된 드라마였다.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상태란 생각이 든다. 포스터의 느낌도 감독판과 일반판의 느낌이 다르다. 그래서 감독판으로 감상하지 않았다면 감독판으로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대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안나의 명대사로 꼽히는 것들이 많지만, 나는 '행복은 애매한데 불행은 확실하다'라는 대사가 가장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거짓 행복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너무나 잘 말해주는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