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주부들>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8시즌 볼륨의 길고 긴 시트콤 시리즈 <위기의 주부들>을 드디어 모두 보았다. 이렇게 긴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나면 후유증이 길게 남는다. 특히 위기의 주부들에서는 주연 캐릭터들을 모두 좋아했기 때문에 후유증이 좀 오래갈듯 싶다.
위기의 주부들은 시트콤이면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섞여 있는 장르이다. 이런 장르는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위기의 주부들은 새 시즌마다 주가 되는 새로운 미스터리가 생겨서 지루함은 좀 덜했다. 사실 인물들의 죽음이 너무 남발된다는 느낌도 있고 초반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그 죽음들의 무게도 가벼워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보았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주제는 이웃한 주부들의 우정이다. 첫 시즌, 그러니까 이야기의 시작도 친구 중 한 사람인 메리 앨리스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 메리 앨리스가 권총으로 삶을 스스로 마감한 뒤 남겨진 네 사람은 생각한다. 그녀(이웃)에게 관심이 더 있었더라면, 이야기를 들어주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기는 어렵다. 특히나 어렸을 적 친구도 아닌 이웃으로 만난 어른들의 친구 사이는 더욱 그렇다.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건 아니지만 이웃이란 울타리를 경계로 집 바깥에 있는 존재니까 말이다. 누구보다 가깝게 살지만 사이에는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미묘한 관계가 위기의 주부들을 재밌게 만드는 요소이다. 주인공 네 사람은 때로는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기도 하면서 위스테리아 거리에서 살아간다.
주부가 주인공들이라 그런지 가족, 가정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이 시리즈의 큰 주축 중 하나로 느껴졌다. 8시즌이나 되다보니 작품 외적으로는 자녀의 역을 맡은 배우들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작품 내적으로는 부모들과의 관계, 감정선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다른 시트콤인 <모던 패밀리>를 볼 때도 느꼈던 건데 긴 시트콤의 아역들이 마지막 시즌에 성인이 된 것까지 보고 다시 시즌1으로 돌아와서 보면 세월의 흐름을 확 느낄 수 있다. 장기 시리즈의 재밌는 점 중에 하나이다.
다시 위기의 주부들 이야기로 돌아오면, 네 명의 주인공 모두 자식들과 함께 성장하는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벽증도 있고 완벽을 추구해서 자식들을 지나치게 컨트롤하며 키우는 브리는 초반 시즌에서 자식과 가장 충돌이 많다. 두 자녀 모두 격렬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과격한 사고까지 치게 되는데 마지막 시즌에서 브리는 약간 엇나간 자식들의 모습까지도 지지하고 품어주게 된다. 가장 덜렁거리면서 오히려 자식인 줄리에게 챙김을 받던 수잔은 마지막에선 줄리를 돕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기도 하고, 아이를 갖지 않으려 생각했던 가브리엘은 두 딸을 키우게 되며 그 중 하나는 친자식도 아니지만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게 된다.
궤가 약간 다른 주인공도 한 명 있다. 시즌 처음부터 자식들이 복닥하게 많았던 르넷은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마침내 육아에서 벗어나 자신의 커리어를 되찾게 되니 말이다. 자식이 가장 많은 르넷이 자식과의 커넥션이 가장 무난하고 평범하며, 어쩌면 보통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족 관계를 보여준 게 기억에 남는다. (비록 포터가 후반에 기함할만한 사고를 치긴 하지만 말이다.)
가장 큰 스토리들은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나는 그보다 캐릭터들 개개인의 변화와 성장을 더 중점으로 보게 됐다. 네 명 중에서는 브리의 스토리가 가장 재밌었다. 전통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인 브리는 완벽한 '하우스 와이프'였지만 초반 시즌에서 의사 남편인 렉스를 잃고 이후 다른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고, 그러면서 주부보다는 독립적인 커리어우먼 여성상에 가까워진다. 시즌 중반에는 코스 요리까지 완벽하게 준비하던 경험을 살려 책을 출판하고, 외식 사업을 하며 성공한 CEO가 되기도 하고 결말에서는 보수단체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캐릭터 내면의 성장으로는 융통성이 없을만큼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 선을 긋던 브리가 마지막에는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비밀을 떠안고 죄까지 짊어지려 했다는 게 좋았다. 길고 긴 시즌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넓었던 캐릭터가 아닌가 한다.
진주인공이라 불리며 시즌 전반적인 큰 사건에 가장 깊게 관여한 수잔의 경우, 위기의 주부들 시즌 전체가 수잔과 마이크의 러브스토리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크가 위스테리아로 이사오면서 미스터리에 다가가는 게 첫 시즌의 내용이다. 그리고 수잔과 마이크,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지고 오해하고, 다시 결혼했다가 권태기가 찾아오고 사건이 생기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걸 깨달으며 재혼하고, 그러다 뜻밖의 사건으로 마이크가 운명을 달리하는 것까지 마지막 시즌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8개의 시즌으로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잔의 입장에서 위기의 주부들은 마이크와의 러브스토리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한편 르넷의 입장에서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커리어우먼이었던 르넷이 다시 직장에 복귀하고 싶어하는 것이나 톰의 커리어하이를 위해 더 나은 직장으로 이직할 것을 종용하는 등 두 사람의 모습이 정말 현실적인 고민과 가깝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즌 후반에서는 르넷의 권유로 좋은 직장으로 옮긴 톰이 바빠지고, 커리어 문제에 마음대로 참견하던 르넷과 갈등이 깊어지며 두 사람 사이가 흔들리기까지 하는데 이런 일련의 현실적인 문제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란 게 두 사람 모두의 입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었다. 물론 인생의 사랑이며 원앤온리인 두 사람이 권태기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가장 좋았던 점이다. 두 사람이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씬은 정말 명장면이었다. 르넷의 'you.'라고 되뇌이는 장면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후에 톰이 르넷의 커리어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는 것까지, 결말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의 스토리를 이야기하자면, 다른 주인공들의 사랑과 가정에 대해서도 같이 곁들이고 싶다. 브리는 전통적인 가정과 부부의 모습에서 커리어우먼이 되고 자유롭게 사랑을 찾는 인물이 되었다. 수잔은 교통사고와도 같은, 인생에서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에 묻을 강렬한 사랑을 다룬다. 또 르넷은 일상적이고 친근하면서 단단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브리엘은 개인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가브리엘이 처음에는 카를로스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초반 가브리엘의 사랑은 기반이 단단하지 않다고 느꼈다. 카를로스를 완전히 믿지도 못했고 바람을 피우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각종 사건을 겪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신뢰로 지키는 것으로 두 사람은 시즌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부부다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카를로스가 감옥에 가던 첫 시즌의 모습과 마지막 시즌에 가브리엘이 카를로스를 감옥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은 시즌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대비를 이루기도 하고 말이다. 결말부에서는 모델이었던 경험과 좋아하는 쇼핑 취미를 살려서 퍼스널쇼퍼로 일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카를로스와 입장이 역전되는 것을 보면 개인적인 성장으로도 재밌는 면이 참 많았던 캐릭터다.
오래된 시리즈라 지금 보면 정말 말도 안 되게 구시대적이다, 싶은 사상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는 시트콤이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을 따라가다보면 더욱 몰입하면서 보게 된다.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할까. 한동안 밥친구였던 드라마를 다 봤으니, 다음에는 가브리엘을 맡은 배우가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는 <은밀한 하녀들>을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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